미봉책

아빠가 하재민을 데리고 몇 시까지 어느 호텔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아마 누군가의 결혼식이었던 것 같다.

나는 분명 하재민을 차려 입히고 제시간에 출발을 했는데, 택시를 잡아 탔을 때 밖은 이미 어둑어둑했다.
그리고 택시가 우리를 호텔 앞에 내려준 것은 다음 날 아침.

기겁을 해서 뛰어들어 간 식장 안에는 다른 커플이 행진을 하고 있었고
아빠는 이미 집에 돌아간 후였다.
내가 집에 왔을 때 아빠는 별로 놀란 기색도 없이 그냥 나를 행인이 뿌려놓은 토 보듯이 했는데

여기까지는 내가 꾼 꿈.

제 때 도착하지 못했던 건 아마 상황 탓이 반, 내 탓이 반이었던 것 같다.
악당들이 있기는 있었고, 꿈 속 길이 너무 복잡하기도 했지만
악당들을 물리치고 바로 택시를 잡은 게 아니라 어디서 퍼질러 앉아 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도 억울하지는 않고, 그냥 잘못 했구나 싶기만 했다.
아아, 늦었구나. 또


요즘 나는 여러 중장년 남성들의 면면을 살펴보면서, 누가누가 이상적인 아버지일까를 점쳐보는데
최근에 본 가장 푸근한 남성의 얼굴은 김효명 교수님의 영정 사진이었다.

추도사를 낭독한 모든 사람들은 입을 모아 고인이 신사였다고 칭송했다.

"앞에 나서는 법이 없이 항상 말을 아끼셨다."
"학부생들의 고민까지 들어주셨다." 그런 이야기였는데

아무리 추도사라도 어이 없는 공치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귀로는 원불교 스님들이 중얼중얼 외는 소리를 들으면서, 눈으로는 영정 사진의 백발을 훑으면서
아아, 이 얼마나 따뜻한 아버지의 얼굴인가  하고 감동을 하다가
곧 신사와 따뜻한 아버지는 별개의 문제임을 깨닫고
이런 식의 큰 바위 얼굴 찾기는 그만두자고 생각했다.



덧글

  • 밝을고를 2011/03/29 22:46 # 답글

    아아 멋진구성 +_+
    댓글 달면 또 글 안 쓰는거 아닌가
  • 코알라 2011/03/30 22:16 # 답글

    아 이런 구성진데다가 구성을 잘 갖춘 블로깅을 해야하는데
    나처럼 자꾸 "싸지르는" 블로깅을 하면 안된당께.

    누군가 먼저 댓글 달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 2011/04/28 03:24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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